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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 조지 손더스

유목적 표류 2024. 11. 21. 16:21

 

 

 

 

엄청난 호평을 받는 작가의 처음 접하는 작품, 분위기 있는 표지, “12월 10일”이라는 의미와 의도를 알 수 없는 제목까지. 호기심을 동하기엔 충분한 조건들이다. (참고로 “12월 10일”은 책 마지막에 실린 단편과 동명의 타이틀이다) 유달리 읽는 속도가 느린 달팽이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속도가 붙어 며칠 만에 다 읽었다. 그리고나서의 감상평은 “다음에 읽을 조지 손더스 작품은 또 뭘까?”

 

 

영화든 책이든 간에 웬만하면 장점을 짚어주려고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굳이 애써 그럴 필요도 없다. 그냥 그 자체로 재미있고, 흥미롭고, 장점이 가득하니까. 사람마다 호불호야 갈리겠지만 개인적으론 근래 읽은 책 중에서 “12월10일”이 제일 재밌었다. 이 독창적인 독특함이라니. (의식이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듯한 인물들의 생각과 대화말이 종종 등장해 흐름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 부분을 잘 씹어 이해해야 한다는 것 정도가 주의할 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읽자마자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던 첫 수록작 ‘승리의 질주’ 부터 마지막 수록작인 ‘12월 10일’까지, 수록된 10편의 단편들은 분량의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제각각의 임팩트와 힘을 잃지 않는 보석같은 작품들이다. ‘막대(sticks)’와 같이 한쪽 반 짧은 분량의 단편 또한 마찬가지. 

 

 

 

혹시 기묘한 이야기나 환상특급(twilight zone)이라는 드라마 작품들을 아시는지. 읽는 내내 저들을 보는 기분과 비슷했다. 기묘함과 독특함. 때론 SF공상과학 소설같은 이야기는 판타지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서늘함을 선사한다. 소재와 내용 전개에 있어 한계를 두지 않아 현실적인 면과 비현실적인 면이 뒤섞여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대부분은 어딘가 이상하거나 부족한 결함이 있는 이들로, 평범과는 거리가 있다. 낯선 이에게 의심없이 문을 여는 순진한 소녀부터 기이한 실험의 연구대상이 되는 범죄자, 보호라는 명목 아래 제 아이를 짐승처럼 나무에 매어 두는 여인, 진정한 죽음의 문앞에서야 삶에 대한 욕구를 느끼는 암 투병중인 자살 시도자까지, 쉽사리 공감하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그들에게 감정이입이 어렵지 않은데, 결국 그들이 겪는 상황과 감정이 우리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리라. 특정 배경이나 사건은 다를지언정 그 안에서 겪는 고민, 고통, 슬픔, 우울, 깨달음 같은 감정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매일 겪는 일들이지 않나. ‘기묘하고 공상과학 소설 같기도 한’ 조지 손더스의 작품들이지만 그가 하는 이야기는 결국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와 그 삶에 대한 이야기다.

 

 

부조리한 현실과 삶의 면면들을 냉철하게 표현하지만 읽다보면 의도치않게 종종 웃음을 터뜨리게 되거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조지 손더스 작품의 가장 큰 매력. ‘블랙코미디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 이런 그의 작품들을 이끄는 힘은 작가의 인간과 삶에 대한 다정하고 세밀한 통찰력 덕분일 거라 생각한다.

 

 

짧은 이야기를 읽은 후 ‘이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하게 하고, 또 다음 번엔 그 상상을 펼칠 여지조차 없이 그저 ‘멍’하게 만든다. 실로 10편의 글을 읽는 동안 끊임없이 상상하고 여운에 젖어 멍하기를 수차례.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생각한 바가 있으니, 이 단편집을 선두로 그의 다른 작품들을 접해보고 싶단 욕구.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갈 준비는 이미 첫 수록작 ‘승리의 질주’를 읽은 후부터 끝났다. 이렇게 설레는 기다림이 얼마만이던지! 아주 간만에 강렬하고 뒷맛 또한 깔끔한 맛있는 글을 삼킨 기분. 이 맛난 단편들을 몇 번이고 곱씹으며 즐겁게 기다릴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