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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유목적 표류 2024. 11. 7. 20:35

 

 

드라마, 멜로, 로맨스/ 홍콩,프랑스
감독 왕가위
출연 장만옥, 양조위
 
 
화양연화 花樣年華
가장 아름답고 찬란했던 시절
 
그 유명한 '화양연화'를 드디어 봤다. 전엔 볼 기회도 없었거니와 생각도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타이밍이 맞아서. 꼭 봐야돼! 하는 마음보다 러닝타임도 짧고 시간도 얼추 맞아 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너무 간단하다. 옆집으로 이사 온 남녀가 각자의 배우자들끼리 바람난 것을 알고는 서로에게 의지하다가 점차 진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고뇌, 쓸쓸함 등. 끝. 이 심플하기 그지없는 줄거리의 영화가 무엇때문에 그렇게 극찬을 받고 20여년이 지난 지금 리마스터링에 재개봉까지 하는 걸까? 영화를 보면 안다. 아니, 영화가 끝나고 보면 알게 된다.
 
솔직히 초반엔 많이 잔잔하단 감상이었다. 30분 즈음에 멈춰 두고 간식거리를 가져올 정도였으니까. (워낙에 영화의 명성이 높아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동안 자극적인 컨텐츠에 길들여진 탓도 있을 테지) 이후로는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까지 쭉 몰입해서 봤는데, 너무 뜨겁지도, 너무 메마르지도 않은 온도를 남기고 끝이 났다. 그떄까지만 해도 큰 기대에는 미치지 못한 미적지근한 영화라고만 여겼다. 
 
그런데. 
다음날. 하루종일 틈틈이 생각나는 거다. 정말 말그대로 여기저기서 영화의 이미지와 파편들이 마구 튀어나와. 결국 나도 모르게 <화양연화>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화양연화 OST를 들으며 관련자료, 감상평을 찾아 읽고 반쪽짜리 방송 프로그램까지 보는 수순을 걸쳐 인정하게 되었다. 아, 내가 감겼구나. 종일 생각하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이야. 안 그래? 
 
우리의 장만옥. 
사람들이 왜 장만옥, 장만옥 하는지도 알게 된 영화였다. 어딘지 모르게 외롭지만 고고해 보이던 수 리첸. 그런 수가 점차 인연에 물들어가며 마음을 열고 차우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그런 그를 보고 수줍게 웃을 때의 얼굴. 사랑에 빠진 여인의 숨길 수 없는 미소를 장만옥이 연기하는데, 정말이지 너무너무 사랑스러웠다. 짧게 스쳐지나가는 순간인데도 기억에 남아 지금 이렇게 언급할 만큼. 
수의 표정, 몸의 움직임, 우아하고 적당히 낮은 목소리... 장만옥은 수 리첸 그 자체였고, 양조위 또한 차우로서 뛰어난 연기를 보여줬다. 두 배우 모두 목소리가 좋아서 대화 장면마다 중국어가 이렇게 듣기 좋았던가? 몇 번이나 생각들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두 사람이 호텔에서 만나며 글을 함께 쓸 때.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며 전쟁을 치르던 둘에게 주어진 안전지대 또는 무중력 상태인 듯했다. 이별이나 사랑 또는 불륜 따위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도 둘이서 그저 함께일 수 있는 때와 공간. 무엇보다 행복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음악과 함께 지나가는 그 장면들이 내겐 베스트다. 
 
말 나온 김에 영화의 미장센에 대하여. 잘은 모르지만 영화의 미장센이 뛰어나다, 컬러감이 아름답다란 말의 뜻이 무엇인지 화양연화를 보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미장센이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누군가의 말처럼 영화 장면 장면마다 모든 컷이 예술적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을 정도로. 장숙평이란 미술 감독의 이름이 기억에 새겨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또 화양연화란 영화를 두고 분위기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급변하는 홍콩 사회의 퇴페적인 느낌과 남녀 간의 아슬아슬한 분위기는 화양연화가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명작으로 사랑받는 분명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개중 놀라운 건 직접적인 터치 없이 스쳐지나가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섹슈얼한 느낌을 냈다는 건데... 이게 진짜 쉽지 않다고 생각하거든. 글을 쓰고 작품을 만들고 싶은 입장에서 꼭 배우고 싶은, 욕심나는 부분이다. 
좁은 복도나 골목, 통로 등에서 스쳐지나가는 수와 차우의 모습에서 사랑의 운명을 알 수 있다 하는데, 아무래도 이어질 수 없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거겠지? 가까이 할 순 있으나 결코 닿을 수는 없는... 그리고 결국 스쳐지나가야만 하는. 
 
마지막에 등장한 앙코르와트는 뜬금없이 느껴졌었는데 여러 글들을 읽고 나니 나름 이해가 갔다. 앙코르와트, 시간이 멈춘 영원이 약속된 곳. 그곳에 찰나의 순간, 사랑의 순간을 봉해 둔다. 고로, 화양연화는 영원할 거다. 난 이렇게 이해했는데. 엉뚱하게 느껴졌던 결말이 완벽하게 와닿는다. 왜인지 모르게 <연인>에서 먼 훗날 남주가 여주에게 편지를 보냈던 때를 봤던 느낌이다. 불안정하게 부유하던 시절의 파편들이 마침내 영원으로 약속받아 남는 느낌.
 
책을 읽을 때도, 영화를 볼 때도 외치게 된다. 대체 사랑이 뭐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이렇게 자신을 내거는가. 
내가 가진 막연한 용기가, 진짜 사랑을 경험한 이후에도 제자리를 지킬 수 있을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ps. 제작자 말대로 배우자들끼리 바람이 아니었다면? 와. 그 연기들은 대체 뭐였는데. 그리고 누가 먼저 시작했니. 
quizas, quizas, quizas.